체코의 깊은 산골에 어머니와 딸 마르타가 경영하는 여관이 있었
다. 어머니는 이곳에서 어렸을 때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살
고 있었다. 가난과 고독에 시달린 모녀는 어느날 부터인가 이상
한 범죄에 빠져 들었다. 두 사람은 돈이 많은 투숙객이 들면 수면제
를 먹인 후 돈을 빼앗고는 독약을 먹인 후 시체를 바다에 던져 버
렸다. 20여년이 지난 어느날 말쑥한 차림의 청년이 여관을 찿
았다. 모녀는 청년에게 독약을 먹인 후 강물에 던졌다. 여인은 지
갑에서 돈을 꺼내다가 피살자의 신분증을 보고 절규한다. 그는 바
로 자신이 자금까지 기다려온 아들이었다. 여인은 자신도 아들
을 던진 그 바다에 뛰어 들고 만다. 청년은 고향을 떠난 후 크
게 성공해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나러 귀향하던 길이었다. 이것
은 알베르 카뮈의 희곡 ' 오해 '의 줄거리다. 그리스 비극의 숙명
을 그린 걸작이다. 하나님없는 인생은 허무하다. 많은 사람이 무엇
인가를 찿아 헤매며 열심이 살아가지만 정작 찿아야 할 것, 바라
야 할 것을 잊어 버리고 있는 슬픈 형실이다. 그렇다면 과
연 어떤 게 잘사는 삶일까?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? 인
생가운데 끊임없이 일어나는 물음이다.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이
렇게 대답한다. 혼돈과 공허를 청산하고 '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
게 사는 것 ' 이라고. 기독교 신앙은 창조 신앙에서 출발한다. 창조
주 하나님은 만물의 주 (主) 가 되신다. 뿐만 아니라 그분은 통치하
시고 섭리하시는 주 이시다. 인생의 행복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
서 비롯된다. 하나님의 창조가 모든 혼돈가 공호를 질서로 바꾸
지 않았는가? 그분의 ' 주 되심( Loadship)' 을 인정하라. 또한 절
대 진리의 성경 말씀으로 돌아 가야 한다.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에
게 ' 말씀이 육신 되신' (요1:14)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며 당신
을 나타내셨고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엔 하나님의 감동으
로 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자신을 알리셨다. 그러므로 그
분을 우리의 주로 인정한다면 그분이 하신 말씀, 즉 성경을 삶
의 지표와 기준으로 삼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. 옳고 그름보다
는 좋고 싫은 것이 중요한 세대, 이것도 옳고 저것도 이해된다
는 상황윤리식의 기독교가 누룩처럼 번지고 있는 세대다. 세상
이 다 '노' 라고 할때 '예스'하며 자유하는 힘, 세상이 '예스'라
고 할때 '노'라고 할 수 있는 그 힘은 다름 아닌 바른 말씀을 믿
고 지키는데서 나온다. 그 용기를 교회가 먼저 내야 할 것이다. 그
것이 바로 허무와 공허함으로 뒤덮인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가
야 할 단 하나의 길이다. 신호등은 보행자와 차에 제약을 주기 위
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. 보다 더 편리하게 갈 수 있도록 하
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. 성경말씀도 그러하다. 얼핏 느끼기에 나
의 자유를 옥죄는 불편한 율법 책 같지만 그렇지 않다. 왜냔면 성
경은 '진리' 이기 때문이다. "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
케 하리라" (요 8:32) 그 진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누리고 싶어 하
는 자유를 뛰어 넘는 진정한 자유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. ' 옳은길'
을 내딛는 것은 누구도 아닌 당신의 선택에 달렸다.
-2014년 1월 19일-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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